Bongta      

3.5와 9 그리고 10

소요유 : 2016.12.04 16:36


3.5와 9 그리고 10


“국민 3.5%가 집회에 참여하면 정권을 끌어내렸다.”


에리카 체노베스(Erica Chenoweth)라는 정치학자가 시민 혁명 사례 323개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란다.

기실 3.5%란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참여율이 높다.

국민 중 어린아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빼고,

생업이나 개인적인 일로 참여가 어려운 이까지 빼면,

어지간한 이는 다 참여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이 정도로 참여율이 높으려면, 여느 집회와는 다른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무릇 시위엔 앞을 이끄는 전위(前衛), 강성(强性) 참여자가 있다.

이들은 참여자 비율이 3.5%가 아닌 0.1%일지라도 선봉(先捧)에 서고,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고 시위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3.5% 이상이 되려면, 이들 외의 사람들도 합류하였다는 말인데,

그러려면 평소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이도 쉽게 참여할 만한 시위 현장 조건이 마련 되어 있어야 한다.

폭력 진압이 자행되면 이런 이들은 거리에 나오지도 못하고,

머리 수그리고, 그저 체제에 복속하는 부류이다.

평범한 대중들은 대개는 이 축에 속한다.


평화시위라는 이름으로 시위가 계속되자,

집에 숨어 있던 이까지 쉽게 현장으로 유인된다.

물론 상대측인 체제 유지 세력도 폭력 진압을 하지 않아야,

이들은 부담 없이 밖으로 따라 나올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양자의 비폭력이 유지될 때라야,

유약자(柔弱者)들이 3.5%의 통계 안으로 편입될 수 있다.


평화시위가 가능한 것은 시민 의식이 성숙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 사회 환경이 발전하여 체제 유지 세력의 폭력 행사가 어려워졌기 때문인가?


어제 시위 현장에 나가보니,

우리나라 시민들의 질서 유지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촛불을 손에 들고, 민중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빠져나가는데,

마치 고수(鼓手) 추임에 따라 춤을 추는 춤꾼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니 질서 지키면 흐름을 유지하였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촛불 사고도 날만 하였지만,

내가 목격하기로는 하나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상대를 의식한다.’


사람이란, 일정 수준 이상이 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만들어질 수 없다.

밀집 대형에서 낱낱의 개별 단자가 상대를 의식하되, 

이게 서로 조화를 이뤄, 총체적인 질서를 나으려면,

고도(高度), 고차원적(高次元的)인 의식 통합 능력이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움직이는 물체의 유동성(mobility)을 운동역학적으로 고찰할 때,

거기엔 필연적으로 흐름을 거스리는 물리적 마찰(friction)이 따른다.

방향 운동이 이 마찰 요소를 극복하지 못하면 유동성은 급격히 떨어지거나,

응체(凝滯) 되어 멈추게 되거나, 

급기야 쌓여가는 내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외부로 폭발하며, 현 단위 시스템이 깨지게 된다.


광화문 시위 현장을 유의하여 관찰하고 있자니,

이 유동성이 고유의 리듬을 갖고 유연하게 흐르며 역동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개개인이 마찰 요인을 총체적으로 수용, 조절할 능력을 보지(保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며, 한편으론 고마웠다.

우리 사회의 시민 의식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깨닫게 되었다.


앞에서 제기한 두 가지 의문 즉,


평화시위가 가능한 것은 시민 의식이 성숙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 사회 환경이 발전하여 체제 유지 세력의 폭력 행사가 어려워졌기 때문인가?


첫 번째 시민 의식이 높아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는 일응 그러하리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설혹 이를 인정한다 하여도 과연 저들 체제 내 위인들의 마음보까지 바뀌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

최근 체제에 부역하던 관리 두 명이 자진 사퇴하기는 하였지만,

이외는 꿈쩍도 아니 하며, 체제에 복속하고 있다.

게다가 친박은 여전히 박근혜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있으며,

비박도 동네 우물가 두레박처럼,

우물 속으로 들어갈 때는 허연 배때기를 뒤집어 내놓지만,

올라올 때는 언제 그러했느냐는듯 무엇에 복속하듯 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며 으뭉스럽게 올라온다.

저들은 이리 마음보를 수시로 바꾸며,

우물 깊이를 측량하고 있다.

모두 제놈들 뱃구레에 구겨 넣을 샘물에만 관심이 있음이다.


그런데 말이다.

3.5% 수준에서 만약 체제 유지 세력에서 폭력을 동원하게 되면 어찌 될 것인가?

문득 나는 이런 지극히 불순한 의문을 일으켜 보는 것이다.

앞에서 내가 전제한 양자 비폭력 조건 하에서 유약한 이들의 참여가 가능하였다면,

거꾸로 일방이든 쌍방이든 간에 폭력적 환경으로 바뀔 경우,

유약한 이들은 현장에서 급격히 이탈하고 말 것이다.

이럴 경우 3.5%는 유지되지 못하고 아래 수준으로 깨질 것이다.


그러니까 에리카의 결론,

‘3.5%는 비폭력 조건에 의해 가능해지고, 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진다.’

여기에 의지하자면 3.5% 도달 선행 조건은 비폭력이 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를 회의하고 있다.

왜 그런가?

인간은 결코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근원적으로 인간을 회의한다.


김무성은 바로 엇그저께 이리 말했다.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 11.23

“박 대통령 만난 걸 후회한다" 11.25


그는 바로 총선 전까지만 하여도 이리 외쳤던 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근혜 대통령",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을 사람은 박 대통령 밖에 없다“


최근 내내 탄핵소추 발의에 찬성하겠다던 이가,

박근혜의 3차 담화가 나오자,

갈짓자 걸음을 하며 회색 지대 그늘로 슬쩍 몸을 숨기고 있다.

군자대로행이라 하였음인데,

이 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늘 뒷골목을 즐겨 후빈다.


설혹, 나랏 사람들의 기억력이 금붕어 수준일지라도,

이리 바삐 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면,

이 위인의 실체를 어느 누구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적질을 하면 구족을 멸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제 잠깐, 우선은 이 이야기를 좀 하고나서 다음 말을 마저 잇기로 한다.


구족(九族)이란 무엇인가?

이는 부계 4족, 모계 3족, 처계 2족(父族四, 母族三, 妻族二)을 합하여 말한다.


1. 父族四:指自己一族。出嫁的姑母及其兒子、出嫁的姐妹及外甥、出嫁的女兒及外孫。 

2. 母族三:是指外祖父一家、外祖母的娘家、姨母及其兒子。 

3. 妻族二:是指岳父的一家、岳母的娘家。


이것 번거로우니까 번역은 약하지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친소를 따져 가까운 친족 아홉 권속이라 여기면 족하다.


(※ 때론, 구족을 이와는 다르게,

父, 祖, 曾祖, 高祖, 自己, 子, 孫, 曾孫, 玄孫

이리 셈하는 경우도 있다.)


有田一成,有衆一旅


이것은 하(夏)나라에 얽힌 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6대 소강(少康)이 반역자에 쫓기었다 다시 국권을 회복하게 되는데,

밭 한 뙤기(方十里), 한 무리(五百人)로써 기초를 닦고 힘을 길러 나라를 되찾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상대인 한착(寒浞)이 소강 일족 씨를 말렸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다시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참초제근(斬草除根)

잡초를 제거하려면 그 뿌리까지 제압하지 않으면 다시 자라게 된다.

무릇 잡초를 제압하려면 돌멩이로 뿌리까지 완전히 눌러두지 않으면 되치기를 당하게 된다.


진시황 시절에 족주(族誅)라 하여 엄한 법이 있었다.

반역 오랑캐 적당 3족을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이르면 점점 더 혹독하여졌다.

3족이 5족이 되고 급기야 9족에 이르렀다.

여기 명(明)에 이르면, 방효유(方孝孺)의 경우엔 십족(十族)까지 멸하게 된다.

방효유가 당시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이는 후에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된다.)

명(命)한 조칙을 쓰지 않고 버티자 소위 10족까지 죽이게 되는 것이다.

연왕이 제위를 찬탈하자 방효유는 이에 협조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길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 연왕과 방효유의 문답은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므로,

얼핏 외양상 본글의 주제 흐름을 거슬리지만 음미하고자 한다.

기실 따지고 보면 이따가 쓰겠지만, 내용상으로는 거슬릴 바도 없다.


朱 : 難道你不怕死嗎?

方 : 要殺便殺,詔不可草。

朱 : 難道不顧及你的九族嗎?

方 : 不要說九族,誅十族也不怕。


“‘설마 죽기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죽일 것 같으면 바로 죽이십시오. 조칙은 쓸 수가 없습니다.’

‘설마, 네 9족까지 돌보지 않겠단 말인가?’

‘9족까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십족을 죽인들 두렵지 않습니다.’”


황제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방효유 9족을 죽였으며,

더하여 문하생까지 죽이고 말았으니,

혈족이 아님에도, 죽임을 당한 친구, 문하생 등을 10족이라 하는 것이다.


옛날 역적이 한 집안에 나오면,

그 집안 묘역을 뒤집어 엎어놓는다.

윗대 묘총을 아래로 옮기고 아랫대를 위로 옮겨,

하역(下逆), 하극(下克) 상태로 바꿔버렸다.

이를 도장(倒葬)이라 한다.


나는 생각한다.

지금 저들이 하는 짓을 보면 박근혜도 쉬이 내려올 상 싶지 않을뿐더러,

설혹 이 자가 내려온다 하여도 풀뿌리까지 뽑힌 것이 아님이라,

쉬이 다시 잡초가 무성하고 말리란 염려가 있다.


저들 무리가 하고 있는 양을 보면,

반성은커녕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사술을 다 부리고 있다.


그래 나는 고대의 초가(抄家), 멸족(滅族)을 떠올리고 있음이다.

게다가 나라 곳곳에선 도장(倒葬)을 하지는 못할망정,

유묘(諛墓)라, 죽은 사람 묘에 엎드려 알랑방귀나 뀌고 자빠진 형편이 아니던가 말이다.

(※ 抄家: 풀 뽑듯 가산을 몰수하는 일

諛墓: 죽은 이의 묘에 아첨하는 일)


야당이라는 치들이 하는 짓을 보아도 이와 그다지 다름이 없다.

한 줌도 아니 되는 비박 눈치나 실실 보며,

아니, 기실은 제 정치적 득실을 재고 따지느라 분주할 따름이겠지만,

아까운 시간을 연신 허비하고 있다.

아마도 필시, 저러다 나중에 비박하고 합치자고 나설 위인들임에 의심의 남음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이하여, 

탄핵소추 발의가 아니라, 가결을 위해 뜸을 들여야 한다며 한 발 뒤를 빼거나,

퇴진하면 명예를 돌보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놓는 허재비들로,

야당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더냐?


프랑스 혁명(1789년) 때, 

평민들이 들고 있어나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나, 부르주아들의 선동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였던 것은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대한 반항이었다.


헌법 1조 ②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민주 사회에선 당위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저항권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사회에서처럼,

성직자 기실 나는 이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냥 종교가라 부르자.

이들 종교세력, 그리고 왕, 귀족들 기득권들이 독식하고 있는 사회적 기회, 재부의 원천이,

기실은 평민으로부터 터하고 있다는 자각, 그리고 자유 선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 일련의 저항의 길로 나아갈 때를 연상해보면,

저 헌법의 말을 바로 여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저 말은 그냥 그럴 듯하게 이론가들이 글을 꾸미고자 가져다 놓은 말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이 가져 간 시민들의 권리를 다시 되찾고,

평등하게 나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러 할 때, 당연 기존 세력에 저항하게 된다.

바로 저 문장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이 저항의 정신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저항이 없으면,

절대 기득권 세력은 가진 것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

특히 물리적 강제가 따르지 않았는데,

꽉 쥐은 손아귀를 풀은 적이 있다는 것을 나는 별로 배운 기억이 없다.


요즘 저항이 평화로 짐짓 포장되어 있다.

나는 그래 이런 안일한 강박증을 염려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평화로써 혁명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비폭력 시위도 물론 저항이다.

하지만 저들의 불소통, 부정부패, 폭압이야말로 폭력적인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엔,

비폭력만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피, 주먹, 몽둥이 따위의 폭력도 기실 폭력을 이기는 유효한 수단이다.

지금까지의 점잖은 비폭력 시위가,

여, 야 불문 국민을 기망하는 결과를 낳았다면,

보다 유효한 다른 수단을 연구해야 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여기에 있다.

가령 갑과 을이 다투고 있는 현장에,

병이 나타나 이리 뱉어내고는, 

배 내놓고는 수염을 쓰다듬고 에헴 하고 기침을 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야.

자자, 참아,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야.’


이것 황희 정승의 고사와 비슷하다.


종이 싸우고 있자.

이들의 발명(發明) 모두를 가하다 하였다.

곁에서 듣던 부인이 이를 탓하자.

부인 말도 가하다 하였다.

(※ 참고 글 : 황희-일리-삼리)


故主施賞不遷,行誅無赦。譽輔其賞,毀隨其罰,則賢不肖俱盡其力矣。

(韓非子)


“고로, 군주가 상을 베품에 바꿈이 없으며,

벌을 줌에 사함이 없다.

칭찬이 그 상을 돕고,

비방이 그 벌을 따르게 한다면,

현자나 어리석은 자가 모두 그 힘을 다하게 될 것이다.”


박정권은 이 말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죄가 있는 이도 국회에서 문제가 있다 하며 말려도,

안하무인 애써, 무시하고 관작 내리며, 송로버섯, 삭스핀 먹이며 불러 썼다.

바른 말을 하는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친일 미화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꽃다운 위안부 소녀를 또 다시 승냥이 적국에 내주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 왕비는 단두대에 올랐다.

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그러하듯,

기득권 세력 중 으뜸인 종교세력들도 평민들에게 배척되었으며,

귀족들 역시 대부분 망명하거나, 학살되었다.


저항은 평화만으로 그 목표가 달성되면 좋겠지만,

이것이 유효한 방책이 되지 못하면,

다음을 심각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하지만, 성공이든 실패이든,

그 다음의 다음 역시 대비하여야 한다.


촛불 다음이 더 무섭다.

저들 세력들을 참초제근(斬草除根)하지 못하면,

더 은근하고, 야비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반석압초(搬石壓草)임이라, 

자고로 잡초를 제거하려면 반드시 돌로 눌러놓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럴 역량이 지금 우리들에게 있는가?

촛불 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제 시위 현장에서 처음으로 횃불을 보았다.

횃불을 보자 혈관에 피가 끓는다.


하지만,

그 다음 일도 생각하여야 한다.

斬草若不除根,春至萌芽再發。

잡초를 자르데,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면,

명년 봄에 이르면 싹이 다시 돋아나는 법.


우리는 과연 저 친일 잔존 세력들의 뿌리까지 제거할 수 있는가?

우리는 과연 저 어리석은 민중들을 바로 일깨울 수 있음인가?


최근 어느 동영상 하나를 보니,

도올은 저 김무성을 대단하다고 찬탄하고 있더라.

(https://www.youtube.com/watch?v=IchG5uLH9CU&t=7s

time line : 7:16)


또 어떤 동영상에선 이리 증언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x9ACzwr5U4&list=PLxrXSNAnHXeIQcwTL2vxVxeIuIuFsx9nW&index=1

time line 1:27:46)

백범 선생을 죽인 안두희의 배후였던 김창룡의 묘는 지금 대전 국립현충원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 가까운 곳에 곽낙원(郭樂園) 여사의 묘가 있다.

이 분은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시다.

이 더렵혀진 역사 뒤에,

지금 오늘에도 국정교과서를 만들면서,

겹겹으로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조차 이제야 알고 있다니,

나 역시 못나기는 매 한가지이구나.


아직, 3.5%를 찬양하지 말지어다.

우리는 환상을 대하고 있다.

잡초 뿌리가 제거되지 않는 이상,

저 숫자는 한낱 미망일지니.

다만 오늘 우리가 미워하는 죄를 확실히 단죄할 때라야,

그제서야 저 3.5%는 현실의 우리 역량을 뒤따라 입증할 뿐이다.

만약 입증에 실패하면,

평화적인 시위라고 칭찬하고, 부추겼던 이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리라.


나, 역시 입만 살아,

어제 촛불 하나 밝히고 돌아왔을 뿐,

짱돌 하나 던지 못하였으니,

오늘 당장 역사의 죄인이다.

부끄럽다.


石去草又復生


봄 들녁을 보아라,

돌로써 잡초를 제거하였지만, 다시 살아난다.

항차 우리는 이제 촛불 하나 켜들은 것밖에 없지 않은가?

짱돌 하나 들지 않고서도 이리도 나라가 소란스러운데,

과연 잡초를 제거할 자신이 있음인가?

이 다음이 더 무서운 것이다.


이어, 한 생각이 떠오른다.
나의 지난 글로 이어진다.


let it be(隨緣)

(※ 참고 글 : ☞ let it be)


요즘 같이 촛불이 가랑가랑 흔들리고 있을 때,

어울리는 글을 하나 얻었다.


不變隨緣,從體起用;隨緣不變,攝用歸體。體用如如,無住無染,無移無異,斯真了生死矣。


無住無染

어디 머무르지도, 어디 물들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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